천려일실(千慮一失)
천려일실(千慮一失)을 상고하며
실수 없는 사람 없다(Every man is liable to error.)
‘실수’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래 알프레드 아들러(Alfred Adler)라는 심리학자는 “건강한 사람이란 불완전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질 수 있는 사람“이라고 정의했습니다. <바이센터니얼맨>이란 영화를 보면 로봇 NDR-114가 인간으로 점차 변화합니다. 엔지니어의 ‘실수’때문입니다. 로봇 NDR-114를 만들던 엔지니어가 샌드위치를 먹다가 마요네즈 한 방울을 로봇의 복잡한 회로 위에다 떨어뜨린 것입니다. 실수는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감독은 NDR-114가 인간으로 변화하는데서 가장 중요한 것이 ‘실수’라는 점을 줄곧 상기시킵니다. 로봇은 여러 ‘실수’를 거치며 감정을 갖추고 끝내 인간보다 더 인간이 되어 사랑하는 인간 여인을 얻습니다. 그동안 200년이란 세월이 흘렀습니다. ‘200년 사내’ ‘바이센터니얼맨’이 된 것입니다.
‘천려일실(千慮一失)’이란 말이 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이라도 많은 생각을 하다 보면 하나쯤은 실수가 있다’는 말이지요. 원말은 “지자천려 필유일실(智者千慮, 必有一失), 우자천려 필유일득(愚者千慮, 必有一得)”이지요. 즉 이 말은 “지혜로운 사람이라도 많은 생각을 하다 보면 하나쯤은 실책이 있고,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천 번 생각하여 한 번은 맞힐 수 있다”라는 말입니다.
『사기(史記)』 〈회음후열전편(淮陰侯列傳篇)〉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합니다.
회음후 한신(韓信)이 조(趙)나라의 군대 20만 명을 격파하고, 조나라 재상 성안군(成安君)을 죽였다. 그리고 조왕과 모사 이좌거(李左車)를 사로잡았다. 한신은 이좌거의 능력을 일찍부터 알고 있었기에, 그를 불러 연(燕)나라와 제(齊)나라를 공격하여 승리할 방법을 물었다. 그러나 이좌거는 자신은 대답할 능력이 없다고 하면서 거듭 사양하였다. 계속되는 한신의 설득이 있고나서 마지못해 이렇게 답하였다. “옛말에 ‘슬기로운 사람도 천 번 생각에 한 번의 실수가 있을 수 있고(智者千慮, 必有一失), 어리석은 사람도 천 번 생각하여 한 번은 맞힐 수 있다(愚者千慮, 必有一得)’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미치광이의 말도 성인은 가려서 듣는다고 하였습니다. 신의 계책이 반드시 채택될 것인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충성을 다해 아뢰겠습니다.”
이 말은 이좌거 자신이 쓸 만한 계책을 가지고 있다는 자부심이 깔린 말이지만, 지자(智者)와 우자(愚者)의 조화로 보아도 무방할 것입니다. 1류와 3류가 조화로울 때, 여기에서 완벽한 지혜가 나오는 것입니다.
‘천려일실’이란 말이 나온 김에 이이 선생의 흉 한번 보겠습니다.
13세에서 29세까지 생원시와 식년문과에 무려 9번 장원 급제하여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불린 율곡 이이(李珥,1536-1584) 선생에게도 이러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이 선생이 한 번은 중국 사신을 맞이하는 원접사(遠接使)로 나갔답니다. 그때 중국 사신 왕경민(王敬民)이란 자가 <새벽에 출발하여 조서를 반포하러 가다(早行頒詔詩)>라는 시를 지었고, 이이가 이 시를 차운하였습니다. ‘차운(次韻)’이란 남이 지은 시의 운자(韻字)를 따서 시를 짓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이 선생은 왕경민이 운자(韻字)를 틀린 줄을 모르고 그 틀린 운자를 그대로 차운하였습니다. 글 하는 이들의 빈정거림이야 넉넉히 짐작하고도 남습니다.
권호인(權應仁)이 찬한 『송계만록(松溪漫錄)』에는 이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 권호인의 기록을 슬쩍 엿보면 이렇습니다.
“대개 머리를 조아리다의 ‘계(稽)’자가 모두 측성(仄聲)으로 쓰이는데, 왕경민이 이미 틀린 것을 율곡이 따라 틀렸으니 이 어찌된 일인가. … 율곡은 재주가 뛰어나고 박식다문했지만 급작스러운 때에는 늘 이런 착오를 하여 몇 번이나 웃음가마리를 면하지 못하였다.”
(蓋稽首之稽 皆用仄聲 而王公旣誤 栗谷襲謬何耶…栗谷才氣過人 博識多聞 而倉卒之際 尙有此錯 幾不免貽笑)
재주가 율곡에 미치지 못하는 자들은 새겨들을 일입니다.
‘실쑤’, 아니 ‘실수’를.
<바이센터니얼맨(BICENTENNIAL MAN)>: 크리스 콜럼버스 감독, 로빈 윌리엄스 주연의 SF(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