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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의 아들’과 ‘신의 아들’

간호윤 2009. 2. 6. 09:37

‘과학의 아들’과 ‘신의 아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보라. 하나님께서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리.”

전도서 7장 13절

 

우성형질만으로 조작된 ‘과학의 아들’과 부모의 사랑 때문에 열성형질로 태어난 ‘신의 아들’ 이야기. 1997년에 만들어진 SF 영화《가타카(Gattaca)》는 저 대사로부터 시작한다.

이 영화는 앤드류 니콜이 감독을 맡았으며, 에단 호크, 쥬드 로, 우마 서먼 등이 출연했다. 영화 제목 '가타카(GATTACA)'는 DNA를 구성하는 염기인 아데닌(Adenine), 티민(Thymine), 시토신(Cytosine), 구아닌(Guanine)의 머릿글자를 조합한 말이다.

영화는 과학적 유전자 조작으로 태어난 사람들이 사회 상층부를 이루는 반면, 전통적인 부부관계로 태어난 사람들은 열등한 것으로 취급받아 사회 하층부로 밀려나는 디스토피아( Dystopia)적인 미래를 배경으로 한다.

저곳에서 부모의 사랑으로 태어난 자연 잉태자들은 신의 가혹한 형벌을 받은 자들이다. 그들은 태어나는 순간, 인간으로서의 결함을 모조리 갖고 있는 부적격자다. 부모의 사랑으로 태어난 빈센트 안톤, 그의 첫 이력서는 치명적이었다.

 

신경계 질병 60% 가능

우울증 42% 가능

집중력 장애 89% 가능

심장질환 99% 가능

조기사망 가능

예상수명 30.2년

 

세상 빛을 막 본 빈센트의 발에서 한 방울의 피로 알아낸 미래이다.

유전학자에 의해 인위적 조작을 통해 태어난 동생 안톤은 최상의 조건을 갖추었다. 신체, 두뇌 등, 유전학자의 말대로 ‘천 번 자연 임신을 한다 해도 얻지 못할 조건’이다.

부적격자 빈센트는 우주인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말처럼, 부적격자 빈센트가 우주에 가장 가까이 가는 길은 우주 항공사 ‘가타카(Gattaca)의 청소부’가 되는 것만이 유일했다.

청년이 되어 집을 떠난 빈센트는 전국 화장실의 반을 청소하고, 드디어 가타카의 청소부가 된다. 건물 바닥을 거울보다 더 반짝이게 하는 것이 우주 항공사 가타카 청소부의 임무이다.

우주인이 되기 위한 빈센트의 신에 대한 도전, 꼬마둥이 시절 꿈은 여기서 마침표를 찍게 된다.

빈센트는 청소부를 하여 모은 돈으로 제롬 머로우의 유전자를 산다. 제롬 머로우는 유전학자의 조작된 우성형질로 태어났지만, 사고로 하반신 마비가 되었다. 우주인이 되기 위해선 우성형질의 유전자가 필요했다. 그동안 우주 항공사를 꿈꾸며 자신을 가꾸어 왔다하더라도 빈센트의 유전자로는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미 굽은 몸으로 태어난 빈센트,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이다. 그가 몸을 펼 수 있을까?

영화는 그럴 수 있다고 힘을 주어 말한다.

빈센트의 저 말로.

 

“가능한 지 아닌지의 운명을 정하는 것은 자신의 몫이야.”

“모든 게 가능해.”

 

유전자를 조작해서 제롬 머로우가 된 빈센트. 문제는 제롬 머로우의 큰 키, 빈센트는 열성 형질인 키를 늘이기 위해 다리를 수술대 위에 올린다. 빈센트는 결국 주위 사람들의 도움으로 우주 비행선에 몸을 싣는다.

그렇다면 유전자를 조작한 것은 부정 아닌가?

부정일 수 없다. 우성형질로 태어난 동생 안톤과 제롬 머로우만이 우주 비행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먼저 부정이다. 주위의 도움이 그것을 증명한다. 빈센트에게 도움을 준 이들 역시 하나 같이 빈센트와 유사하다. 심장이 열성인 여자친구, 자식 또한 빈센트와 같이 열성인 의사, 심지어는 꿈을 잃었던 제롬 머로우까지. 자연 잉태자, 부적격자로서 빈센트가 사는 유일한 길임을 이해하고 돕는다.

그러나 사실 그 모든 것은, 빈센트가 꾼 꿈의 곁가닥이다.

동생 안톤과 수영 시합을 하는 빈센트를 주목해 보자. 바다를 헤엄쳐 가다 지쳐 먼저 돌아서면 지는 게임이다. ‘천 번 자연 임신을 한다 해도 얻지 못할’ 조작된 유전자로 태어난 동생 안톤을 빈센트가 이겼다. 이길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방법은 이것이다.

 

“난 되돌아 갈 힘을 남겨 두지 않아.”

 

동생 안톤이 어떻게 형이 “나를 이길 수 있느냐?”고 묻자 빈센트가 한 말이다. 빈센트는 동생과 시합에 목숨을 걸고 임했다. 물론 빈센트가 목숨을 걸은 것은 동생 안톤이 아닌, 자신의 운명이었지만.

남들은 서넛씩 갖고 있는 그 흔한 인맥도, 학벌도, 학력도, 머리도, 신체적 강인함도, 심지어는 생긴 것까지도 우습게 생겨먹은 사람들, 신의 축복을 덜, 혹은 아주 덜 받은 자들에게 이 세상은 저 영화와 다르지 않다. ‘과학의 아들’과 ‘신의 아들’은 늘 현재성이다.

더욱이 작금의 대한민국-, 나는 저 영화 속 디스토피아(Dystopia)의 망령을 늘 본다.

무엇으로 이 세상을 살아갈 것인가?